壬辰倭變。乘輿西幸。國內空虛。賊兵充斥。號令不行。幾於無國者逾月矣。嶺南郭再祐,金沔。湖南金千鎰,高敬命。湖西趙憲等。倡起義兵。傳檄遠近。自是民始有向國之心。州郡士子。在在召募。以義將稱號者。無慮百數。以至除倭賊。恢復國家。乃義兵之力也 李睡光 『芝峯類說』卷3 君道部 「賞功」
임진왜변 당시 임금이 서행하여 나라 안이 텅 비고 적병으로 가득 찼다. 호령이 전해지지 않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한달이 넘었다. 영남의 곽재우·김면, 호남의 김천일·고경명, 호서의 조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원근에 격문을 전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생겼다. 각 고을의 사족들이 곳곳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니 의병장이라 칭하는 자가 무려 수백에 이르렀다. 이로써 왜적을 무찔러 나라를 회복하였으니 곧 의병의 힘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권3, 군도부 「상공」중에서
聖朝休養臣庶二百餘年。一朝有急。皆爲自全之計。不顧君父之難。今若以草野不起。則擧一國三百州無一男子。寧不爲萬古羞耶。
趙慶男『亂中雜錄』卷1 壬辰年 上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나라의 보살핌을 받은 지가 이백년이나 되었는데도 나라가 위급함에 모두 자기 보전 계책만 세우고 나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나 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삼백 고을의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니,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 조경남『난중잡록』권1, 임진년 상에 기록된 곽재우장군 의병창의 심정 중에서
賊已迫。吾父母妻子。將爲賊得矣。吾里中少年可戰者。不下數百。若齊心據鼎津以爲守。可保鄕曲。惡可束手以待死乎。衆曰諾 。
朴東亮 『寄齋史草』下 壬辰日錄
'적들이 이미 육박해 오고 있으니, 이대로 있으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들은 적의 포로가 될 것이오. 이 고을 안에서 싸울 수 있는 젊은이가 수백 명이나 되지 않소. 만약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정암진에서 저들을 막는다면, 우리 마을은 지킬 수가 있을 것이오. 어찌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단 말이오'. 하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 박동량『기재사초』하, 임진일록에 기록된 정암진 전투를 앞둔 곽재우장군의 심정 중에서
郭再祐在壬辰亂初, 以匹夫起兵, 扼守鼎津, 遮截倭賊, 屢敗其銳之鋒, 以挫賊勢, 賊竟不敢渡鼎津而西向, 其績偉矣。 (且凡與賊戰, 其麾下之爲賊所窘者, 必力救拔出而自其後。以此士卒皆樂爲之用, 恃而無恐。 其後守山城皆用是道, 隱若一長城, 及其爲帥凡番遞之卒, 愛戴如親, 至相語曰: ‘只去家而已, 雖曰立番, 與在家同, 復有何苦乎?’) 如郭再祐者, 當今名將一人而已
- 尹根壽 箚子 中 『光海君日記』卷7 光海君 卽位年 8月 丁卯 -
곽재우(郭再祐)는 임진왜란 초기에 필부로서 군병을 일으켜 정진(鼎津)을 가로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여, 누차에 걸쳐 그 예봉을 무너뜨리고 적의 기세를 꺾어서 마침내 적이 정진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적은 위대합니다. 그리고 적과의 모든 교전에서 휘하가 적에게 몰리게 될 경우,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출해 낸 다음 자신이 그 뒤를 엄호하여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졸들이 다같이 그의 쓰임이 되기를 좋아하며 그를 믿어서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그 뒤로도 산성을 지킬 적마다 이런 방도를 쓰므로 군졸들이 마치 하나의 장성같이 의지하였고, 곤수가 되어서는 번을 교대하는 모든 군졸들을 어버이같이 사랑하여 주므로 군졸들끼리 하는 말이, '집을 나왔을 뿐이지, 번을 서고 있다 해도 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시 무슨 고생이 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명장은 재우 그 한 사람뿐입니다.
- 『광해군일기』권7 광해군 즉위년 8월 정묘 윤근수의 차자 중
嗚呼, 民安而後國, 富國而後兵强, 兵强而後禦敵, 禦敵而後中興.
- 『忘憂文集』卷2 庚戌 8月, 郭再祐 陳時弊疏 中 -
'아! 백성이 편안한 다음에 나라가 부강하며, 나라가 부강한 다음에라야 군사가 강해지며, 군사가 강해진 다음에라야 적군을 방어할 수 있으며, 적군을 방어할 수 있는 다음에라야 나라가 중흥될 수 있습니다.'
- 『망우문집』권2 경술 8월 곽재우장군의 진시폐소 중
郭再祐, 以一介書生, 當國變亂, 誓死奔走, 壬辰以後, 保守鼎津, 丁酉之亂, 亦守火旺山城, 南中之人, 皆稱再祐爲諸將之最.
-『宣祖實錄』卷171 宣祖 37年 2月 丁酉 備邊司 建議文 中-
'곽재우는 일개 서생으로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을 때 죽기로 맹세하고 힘을 다하였는데, 임진년 이후 정암진을 지켰고, 정유재란 때에도 화왕산성을 지켰으므로, 남쪽 사람들이 모두 곽재우를 장수들 중 으뜸이라 합니다.'
-『선조실록』권171 선조 37년 2월 정유 비변사의 건의문 중
常着紅衣, 自稱紅衣將軍, 出入賊陣, 馳驟如飛, 賊丸矢齊發, 不能中。 忠稙果敢, 能得士心, 人自爲戰, 善於應機合變, 軍無傷挫。 旣復宜寧等數邑, 仍屯兵鼎津江右, 下道獲安農作, 義聲大彰。
『宣祖修正實錄』 壬辰年 6月 1日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선조수정실록』 임진년 6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