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임진년) 4월 13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1598년 11월까지 약 7년간에 걸쳐 벌인 전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임진전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쵸노 에끼(文祿 慶長の役) : 일본 연호인 문록·경장 연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항왜원조(抗倭援朝 : 왜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운)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일본 민족의 공격을 받아 전국을 유린당한 전면전쟁으로 조선은 물론 일본 그리고 중국에 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591년 3월 일본이 쓰시마의 소오(宗義智)를 통해 조선에 전달했던 요구는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으로 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원래 요구는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예측한 소오가 문구를 몰래 바꾸어 요구했던 것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정벌하려는 것이 히데요시의 구상이었고, 강화교섭에서도 마지막까지 고집했던 것은 조선남부의 영토할양 이었다. 결국 도요토미의 최대 목적은 영토획득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는 새로운 전쟁에 대비해 늘 군사동원체제를 갖춤으로써 가신을 통제해 왔다. 그리고 전쟁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를 가신에 나누어주고, 가신들 역시 그러한 논공행상을 겨냥해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도요토미도 이와 같은 센고쿠다이묘로서 전국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막상 전국을 통일하자 이러한 메커니즘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영토 정복전쟁을 통해서 메커니즘의 부활을 도모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16세기 말 조선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륙 침략 야심 속에 총 15만 8천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중국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어 참전하게 되면서 이 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대를 맞이하여 결사 항전하였으나,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바로 함락되고 30일 만에 한성(서울)이 점령당하였다. 일본군이 두 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한 가운데,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는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전쟁 발발 이듬해 정월에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대공세를 펴자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4년여 동안 강화회담을 이어갔다.
1597년 도요토미의 무리한 요구로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한때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으나, 조·명연합군은 직산(稷山)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에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성을 쌓고 버티던 일본군은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졌고, 명분도 승산도 없는 전쟁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참전국은 각각 전후수습이 큰 과제였다. 조선은 직접 전쟁터가 되었던 까닭에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다. 경제력의 회복과 아울러 실추된 국가권위의 정립과 사회질서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침략 당사자인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문제로 양대 세력이 대립하더니 결국 세키가하라전투(1600)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다. 일본 역시 전쟁으로 경제적 파탄이 심했으나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로 데려간 사기장 등의 각종 기술자, 인쇄술 등의 선진기술, 학자와 서적 등을 수용하여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경제적 이득과 문화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청이 쇠약해진 명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명은 조선에 대한 파병을 빌미로 막대한 양의 은과 군대의 파견, 명군의 주둔지 마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참여했던 동아시아 삼국은 국내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을 견지하여 활발한 해외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삼국은 세계질서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의병이란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애족 정신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이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같이 오랜 의병의 역사로 인하여 특유의 의병 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아가 의병 정신이 곧 한민족의 특성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항일의 침략 속에서 무력이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되었고, 이 때문에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수십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인 관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난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정하고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맹세하였다. 대장 아래에는 군사의 훈련, 물자의 조달,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하는 참모들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적을 기습하는 유격전 전법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병 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결사 항쟁의 정신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요충지에만 군대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은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22일 의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전국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들은 그 숫자가 한 때 관군을 능가하였다.
또 활약에 있어서도 관군보다 큰 전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관군이 재정비되면서 의병의 숫자도 줄어들고 상당수는 관군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의병 가운데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는데,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 영규와 같은 이는 승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조직은 전기와 후기로 변화하였는데, 그것은 의병운동의 성격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정인홍 군은 5월경부터 초기 의병 조직이 갖추어졌다. 이때부터 향촌사회의 강력한 통제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가의 의병 장려와 통제책에 따라 관직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았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도 유일하게 경상우도에서 향병장이 되었다. 정인홍군의 초기 의병 조직은 학연으로 결합된 문인들이 다수였으며, 합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인사였다. 그러나 의병 하층부에는 관군에서 편입된 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김면 군은 1592년 5월경 초기 의병 조직이 편성되었다. 이후 김면이 경상우도 의병도대장과 경상우병사가 되면서 의병을 총괄하고, 관군화되었다. 이것이 김면 군의 후기 의병 조직이다. 여기에는 경상우도와 좌도의 유력한 의병장들도 편제되어 있는데, 이들은 의병 초기에는 독자적인 향병이나 의병을 주도하다가 후기에는 유력 의병장에게 편입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국가의 의병 통제책과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면 군의 후기 의병 조직에는 경상도 전역의 의병과 관군이 참여하고 있다.
한편, 곽재우 군은 1592년 4월경부터 초기 의병 조직이 갖추어지면서 독자적인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곽재우는 1593년 김면 사망 후 경상우도의 의병을 통괄하였다. 곽재우 군도 의병 후기 단계에 이르면 초기의 의령 지역 인사에서 창녕 인근 지역 인사들로 확대되었다. 그가 경상좌도 병사 등의 직책을 부여받아 관군의 장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정유재란 시기에는 관군의 장으로서 화왕산성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렇듯 경상우도의 각 의병장의 의병 조직 변화가 갖는 의미는 의병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어 활동하였으나, 관군이 정비된 이후 왕조의 입장에서는 의병의 통제가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조정은 의병 통제를 시도하게 되는데, 경상우도에서는 김면과 곽재우를 통하여 의병을 통제·해체시켜 나가면서 의병을 장악하였다.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은 4월 22일 곽재우가 의령에서 수명의 가동을 거느리고 활동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김면을 중심으로 한 거창·지례·성주 방면에서의 의병활동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합천·고령·성주 방면에서의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진주성을 중심으로 해서도 판관 김시민 지휘하의 관군과의 협조 속에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의병 활동이 전개된다.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은 이렇듯 4개의 방면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서로 연합해서 작전을 전개하고 지원활동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 성주에서의 김면과 정인홍의 부대가 연합공격 작전을 폈던 것이나 지례·사랑암 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의 부대가 지원활동에 나선 것이 그 예이고 진주성이 고성의 왜적으로부터 위협받을 때 곽재우가 부대를 이끌고 진주 부근으로 달려온 것이나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곽재우와 정인홍 휘하의 일부 군사력이 진주 외곽에서 지원 활동을 한 것도 그 예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 곽재우, 김면, 정인홍을 들 수 있다. 행의(行義)를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남명은 당시 이론 지향적 비실천적 학풍을 거세게 비판하고 하학상달(下學上達)을 강조했다. 이러한 직설적인 현실대응의 남명학풍은 때로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문인들로 하여금 의병창의 대열에 앞장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상우도의 눈부신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을 자극시키는 파급효과를 가져왔으며, 물론 전라도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탓도 있긴 하지만,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으로 인한 견고한 방어거점 형성이 소조천융경 부대의 전라도에 대한 공략을 소극화 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점도 부인 할 수 없다.
곽재우는 경상우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통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선도한 인물이다. 우선 곽재우 군의 의병 구성 인사에서 초기에는 향촌사회의 혈연적·향당적 인사들이 주였지만, 후기에는 지역적·당파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먼저 곽재우의 초기 의병은 1592년 4월 22일 기병한 후 5월에 들어서면서 초유사 김성일의 노력과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로 의병의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이때 경상우도에서는 초유사에 의해 군사가 합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곽재우 군은 삼가의 윤탁 군과 합군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군세가 날로 늘어났다.
이처럼 곽재우 군은 군사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군을 조직화하고 군무를 분담할 필요가 있었다. 곽재우 군의 의병 초기의 지도부 인사 18명을 분석해 보면 신분별로는 돌격장과 선봉장 등의 소수를 제외하면 15명이 사족이며 지주 계층이었다. 출신지역별로는 의령 11명, 삼가 5명, 진주 1명이었다. 학연상으로는 조식 문인이 4명이며, 허언심은 곽재우의 매형이었다. 곽재우 군은 의령 지역의 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학맥이나 혈연으로 연계되어 유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의병운동 초기 곽재우의 군사는 의령 중심의 향토방위군이었다. 아울러 곽재우 군에는 무관직을 역임한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전투력이 뛰어났다.
한편 곽재우 의병 조직의 하층부에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재지사족들이 지주로서 가동이나 전호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또 자발적인 향민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초유사 김성일의 지시로 독자적으로 향병을 이끌고 있던 윤탁과 오운이 합군하면서 군사수가 늘어났다.
후기 의병 조직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의병을 통제하였는데, 1593년 김면의 사망 이후 경상우도의 의병 조직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곽재우 의병대장, 이광악 부장, 김덕령 좌영, 홍계남 우영으로 임명하여 의병을 재조직 한다. 이는 전선이 경상도에 집중되자 전국의 의병으로 활약하고 있던 의병들을 경상도를 중심으로 편제하여 통제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경상도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연합군이었다.
의령은 지리적으로 서북쪽은 산으로 막히고 동남쪽은 낙동강과 남강의 두 강이 형승을 이룬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의령사람들의 습성에 대해 ‘습속이 굳세고 용맹함을 숭상한다’ 라고 하였다.
의령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지역민의 성향 등도 작용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년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은 곽재우의 창의 초기만 하더라도 주로 낙동강과 남강수계를 따라 의령지역을 자체 방어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최초의 곽재우의 창의에 가담한 사람은 심대승·권란·장문장·박필 등 10여명 이었으며, 이후 의령지역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년 7월 무렵이 되면 삼가현의 군사까지 합류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곽재우와 그 휘하 17장의 군무가 분장된다. 대장 윤탁은 용연에 주둔하고, 선봉장 심대승은 장현, 기찰 심기일은 정호, 복병 안기종은 유곡, 수병장 이운장은 낙동강 서편, 돌격장 권란은 옥천대, 수병장 오운은 백암, 곽재우는 유곡 세간에서 전군을 통제하였다. 낙동강에서 남강의 정암에 이르기까지 60리 사이에는 정찰대가 총총히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의령의 의병부대는 지형, 지물과 뛰어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였으며, 1594년 계사년에 경상우도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활동영역은 경상우도와 창녕·영산·현풍 등 일부 경상좌도까지 확대되었다.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은 전국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의령을 포함한 경상우도를 지켜냄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고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일본군의 전략에 막대한 차질을 주었다.
의령지역의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육전에서의 일본군 최대의 적은 의병이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의 공적은 바다의 이순신의 수군의 공적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양대 승리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