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덕면 교암마을
용덕면 소재지(운곡)에서는 오리길이 넘는데 동남쪽 큰 들판을 기고 있는 낮은 지대다. 어른들 얘기로는 옛시절 동네 어귀에는 근 100자 길이의 물길 때문에 독다리(돌다리,징검다리)가 놓여 있었고, 이 독다리는 외부 지역 나들이를 위한 요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다릿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산골짜기 작은 도랑에 놓았던 큰 돌덩이 몇 개나, 멱서리나 짚섬 같은 것에 돌자갈을 넣어서 놓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 장골 대여섯 명이 목도를 해서 운반할 정도로 큰 바위돌을 드문드문 놓고 그 위에 디딤돌(사람이 딛고 다니기 편하게 평평한 돌을 연결시키는 것)을 연결했다고 하며 큰 물이 들어 독다리가 내려 앉거나 떠내려가면 온동네 사람들이 부역을 하면서 다리를 보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터가 무듬이 또는 무뎀이(물이드는 낮은 지대 즉 저습 지대를 무듬이 또는 무데미라 하는데 물의 받침 소리가 탈락되고 듬이(데미)는 드는 곳이란 뜻의 토박이 말이다) 지대라서 이 마을 주위에는 작고 큰 독다리가 많았다고 한다. 다릿골을 한자로 고치면서 다리 橋에 바위 岩자로 했으미 이 동네는 전통지명을 살린 경우라고 할 것이다. 교암에는 배곡재 밑의 배곡,웃다리골,아랫다리골, 그리고 새터등 네 뜸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뒤로 나직한 산줄기가 흘러 내려 와서 배산임수에 광활한 들판으로 퍽 살기 좋은 마을 환경이지만 요즘 와서는 여름 우수기면 침수 걱정을 해야 하는 저습지다. 상교암 뒷산 골짜기를 장자꿈이라 하는데 옛날 큰 부자가 살았던 터라고 하며 지금도 대밭이 조금 남아 있다. 도 서재고개는 옛날 서당을 열어서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전 서원 겸 재실이 있던 곳이다. 산고개 이름이 산고개 이름이 되었고「용해」또는 「용개」라고 말하는 도랑은 정암강으로 흐르는 깊은 도랑물인데 용이 살았다거나 이시미(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용포 또는 용천이란 말이 변음되어 스이는 지명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새터는 큰동에에서 제금(따로 살림을 차려서 분가해 나간다는 뜻) 나간 사람들이 새 집터를 장만했기 때문에 새땀이니 새터란 지명을 쓰고 있는데 이와 같은 예는 흔하다. 도랑둑도 없고 강가 제방도 없던 시절에는 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메기가 침만 흘려도 앞마당까지 물이 들었다는 곳이라 한다. 웃다리골에 있는 박씨문중재실 반곡재와 박지항공의 서식처였던 송월달, 담양전씨 문중의 경사재가 있다. 그로 재밑 마을안에 김해김씨 문중의 영모재가 있다. 배곡재먼당에는 전절부증숙부인청송심씨지려란 꽃집이 있다. 전복룡공의 부인으로 임란 때 왜구들에게 붙들려 겁탈을 당할 위급한 순간에 은장도로 자기 팔뚝을 끊고 높은 바위 위에서 떨어져 자결하여 인조 때 왕명으로 세운 정문이다. 그 옆에 선묘원종일등공신선무랑충좌위중부자밀성박공휘l무열지충효비가 서 있는데 이 분은 자가 은경호가 만취헌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임란 때 큰공을 세워 일등 공신에 올랐고 또한 부모님의 병환 중에는 온갖 약을 구해드렸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운 효자였다는 바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또 조금 옆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백산선생님과 함께 항잉 운동과 한글운동에 헌신하신 남저 이우식 선생님의 시혜 송덕비가 서 있는데 사인함천이우식시혜비라 새겨져있다. 길을 건너 산자락에는 효자김해김공휘주찬지비가 있어서 옛날 이 배고개 먼당은 정려며 비석이 즐비했기에 일설에 따르면 이 고개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곡 허리 굽혀 절을 하게 되어서 절고개라 했고 배현이란 지명을 썼다는 얘기인데 상당히 근거 있는 좋은 지명인 듯 싶다. 그리고 웃다리골 못미쳐서 길가에는 효자 박성권공 행적비가 서 있다.
충신과 절부와 큰 효자 그리고 가난한 민초들의 시름을 덜어준 큰 부자 송덕비 등을 보면서 그냥 지나갈 사람이 있겠나 싶다. 누구나 고개를 오르면서 허리 굽혀 절하듯 해야했고 재먼당에 서면 저절로 머리 숙여 숙배를 드리는 곳이라니 썩 어울리는 소지명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