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면 두곡마을
정곡면 소재지 부근일대가 법정동리상 중교리며 그안에 중교, 문곡, 두곡의 세동리가 속한다. 지금의 두곡마을은 궁류가는 길로 조금만가면 제법 큰 마을인「막실」이 있고 거기서 비탈길로 조금 더 가면 길아래 나직한 골안 마을이 있는데「양징이」다. 요즘사람들은 「두곡」이고「양정」이라지만 옛날 지명은「막실(막곡)」과「양징이」였고「막실재」까지의 이 골짜기 전체를 그냥「막실」이라 했다는 것이며「양정」뜸은 재밑 양지편의 작은 동네란 뜻으로「양지」 「양징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 기록상으로도 분명히 「막실(막곡)」로 돼 있는데 어느 세월 어떤 연유로「두곡(말실)」이 된 것인지 아는 이가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일제정리 때 어감상 좋지 않은 「막」자를 「말 두(斗)」자로 바꾸었다고 봐서 옳은 것 같다. 임란 때까지도 이 골짜기에는 인가가 없었던 지역이었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군사들이 진(陳)을 치고 여러 개의 병막(兵幕)이 세워지면서 이 골짜기 이름이「병막골」 「막골」이 되었다는 증언이 있긴 하나 아무래도 억지스런 점이 있다. 동남쪽만 열리고 두루 산인데다 서북쪽은 높은 산줄기가 가로 막은 채 길고도 험한 산고갯길인「막실재」(물론 요즘은「두곡재」라 부르기도 한다)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옛 어른들은 제법 넓으면서 깊숙하고 초목만 울창한 골짜기인데다가 큰 재가 앞을 막고 있는 지형 즉 큰골이면서 막다른 골짜기이라서「막실(막골)」로 작명했던 것이며 굳이 한자로 적자니 막(莫)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본동 바로 옆「담안들」이라 부르는 논도가리 몇 개가 있다. 흔히「담안너마지기」라고도 하는데 옛날 은진 송(宋)씨 큰 부자가 살던 집터라고 한다. 1천여평이 되는 터에 형제간이 한 울타리(담장)안에 살았고 돌담장을 높게 쌓았던 그 자리라는 뜻이다. 또 마을 옆「당산등」이라는 나직한 산등성이에는 송씨 선산이 있다하는바 정확한 시대는 몰라도 일찍이 이곳에 살았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할 것이다. 동네에서 보면 앞쪽이 되는 위치에 조산과 큰 당나무가 있다. 비교적 덜 훼손된「조산껄」인데 다른 곳에선 보기 어려운 돌비가 있다. 「수구대장(水口大將), 화주채영석(化主蔡永石)」이라 새겨 놓았고 왼새끼 금줄이 썩은 채로 둘러져 있다. 「새몽골」조산이라 부른다는데 수살막이(수구막이)의 표석인 것 같다. 또「부선덤」이란 큰 덤바위가 있으며 그 곳 또한 집안에 재앙이 생기거나 부정스런 일이 나면 재를 올리고 비손하는 곳이란다. 그리고 재 밑 마을「양징이」뜸은 양지쪽 아늑한 곳이며 바로 앞에 저수지가 있다. 앞쪽에부터 시작되는 비탈 꼬불길이 한참 이어지는 막실잿길, 지금이야 포장길인데 그래도 위험한 고빗길인데 쑥 들어간「전골」에는 광복 후 지금까지도 탑이며 석물이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분명 옛절터라고 볼 수 있으며 골이름도「절골」이 변음돼서 불리어 진 것이라 여겨진다. 못밑「중간들」은 이 골안 중간지점에 위치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망주골」은 원거주지였다는 것이며 한 오십석 하던 집안이 살았던 곳인데 이곳을 떠나 버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큰 돌감나무가 있는 깊숙한 골짜기가「감남골」이다. 보도연맹가입자들이 처참하게 집단학살을 당한 곳이다. 마을 뒤쪽「약물덤」은 큰덤밑에서 맑은 약수가 솟아나는 곳이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운 물이 난다는 것이다. 이 두곡마을 안에는 경주최씨의 두계재(斗溪齋)와 경주 김씨의 재실이 있을 뿐 내 세울 문화유적은 없었다. 가장 처음 은진 송(宋)씨가 입촌했다고 보며 그 뒤 채(蔡), 최(崔), 김(金)씨들이 잇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최씨16집, 차씨 6집, 허씨와 이씨가 너댓집씩이고 정, 김, 임, 황, 강씨등이 두서너집씩이라 두땀을 보태야 41가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