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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UIRYEONG 변화의시작 더 살기좋은 의령

지명유래

칠곡면 산남마을

작성자
칠곡면
작성일
4558
등록일
2003.08.22
읍면
칠곡면
첨부

면 소재지에서 서쪽(대의 합천방면)으로 십리길인데 마을 들머리에 큰 저수지가 있고 동네는 동북향으로 앉았다. 대밭이 울창하고 망용산이 뒤에 버티고 섰다. 이 망용산은 진양땅과 경계를 짓는 산인데 이산을 기준으로 남쪽을 산남(山南), 서북쪽 동네를 산북(山北)로 부르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산남북을 가르지 않고 용동(□洞) 또는 무어동(無魚洞)으로 불렀다. 요즘도 상노인들은 산남이나 산북으로 부르지 않고 용동으로 통한다. 망용산 자락에「미리섶」이라는 천연샘이 있는데 물이 맑고 수량도 풍부하여 산북 앞들의 논물로도 넉넉했다고 한다. 이 미리섶에는 큰 용이 살았는데 어느 날 큰비가 내리는 날 승천하게 되었다. 이 용은 하늘로 솟구치면서 잠시 망용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가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로 높이 솟아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런 뒤로 샘물은 더 맑고 수량도 많아져서 식수며, 농용수로 요긴하게 이용하게 되어 이 근방의 지명이 용천(□泉)이라거나 용동이 되었고 이 샘이름도 미리(용) 새미(샘)라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 마을이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면서 미리섶이 있는 곳은 산북의「댓갱이」가 되고 중간동네는「양지편」으로, 산남이 용동으로 불리게 되었는바 이상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 마을로 가자면 한길에서 큰 저소지 물끝부분을 가로질러 나 있는 둑길로 한참가야 한다. 길 건너 신방산 새비골 밖에는 임진란 때 왜적들의 겁탈에 항거하면서 정절을 지킨 옥낭자의 정열문이 서 있다. 정절통훈대부행산음현감옥화지현손처녀의춘옥씨지려「貞節通訓大夫行山陰縣監玉華之玄孫處女宜春玉氏之閭)」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열문에서 약간 떨어진 산자락에는「선달바구」(선돌이란 말이 변해서 선달이 된 듯함)가 있다. 새방산 밑에 있던 연자방앗간 자리는 없어졌고 동네 앞 모래방천도랑이라는 개울 이름이 있는데 지금은 저수지에 들어가 버렸다. 마을 뒤로 잿길이 있는데 「뒷재」라 수부등으로 통하고 서쪽의「미실재」또는「질넘재(질너머재)」는 진양땅 미천면으로 통하는 산고개 잿길인데 세월에 파 묻혀 지금은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골안」은 동네 안쪽구석뜸이고 「덕어밭」은 옛날「덕이제」라는 서재겸 재실이 있었던 자리이며「들터」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평평한 논들자리라서 그런 지명이 쓰인 것이다. 「지푼골」이라는 곳은 깊숙하게 들어앉은 골이라는 뜻, 즉「깊은골」의 토박이 말이다. 「부모골」(부무골)은 바깥에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골짜긴데 옛날 난리가 나면 마을노인들과 어린애들을 숨겨 피난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활터」는 서재꾼들이 글을 읽다가 활을 쏘던 곳이었다고 하며「머구밭머리」「배암골」「황새들」「새비골」「통새미」「넙쩍등」등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의춘 옥씨의 용연재(□淵齊), 합천 이씨의 성모재(誠慕齋), 안악 이씨의 덕의재(德義齋), 덕남재(德南齋), 그리고 제각인 추원묘(追遠廟)가 있다. 옛날 1백호가 더 살았으나 지금 50여호만 남았다. 옥씨가 20집, 이씨가 17집, 강씨가 4집, 그리고 김, 박 조, 전씨 등도 두어집씩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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