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면 가례마을
가례면이라는 한자는 嘉禮로 적고 면소재지 마을이름은 加禮로 구별해 쓰고 있으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보통「가례본동」이니「큰가례」라 부르기도 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뜸을「새가례」라 부르며, 옛 면사무소 뒤편을「세동네」라고 한다. 결국 세뜸인 셈인데 희한한 점은 묵은 터가 새가례라고 불리는 뜸인데 나중에 생긴 큰 마을에서 지명을 바꾸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가례(嘉禮)라는 지명은 퇴계선생이 지었다고 하며 지금도 동네 옆 큰바위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란 퇴계선생의 암각유묵이 남아 있다. 다리 밑 큰내를 따라 조금가면 서산자락에 백암정(白巖亭)이 있는데 이 정자의 기문에도 퇴계선생의 유허지라는 기록이 있다. 냇가 산자락에 앉아서 놀 수 있는 큰바위가 있는데 선비들이 백암대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곳은 큰도랑 두갈래물이 합수되는 모두 베기지점인데 요즘 들어서는 사람 발길이 끊겼고 정자도 퇴락해서 도괴직전의 상태가 돼있다. 옛시절 300호 가까운 큰 동네였고 부재(부자의 토박이말)가 여럿 있었던 대촌이었다. 예전에 산나물 뜯고 길쌈하면서 불렀던 부녀자들의 노래에는 「가례거튼 한도방에 시집못간 내한이야」란 구절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동네의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서녘산이「뒷동산」「뒷산」인데 숲이 좋고 정동향이라 수십 년 전부터 백로(白鷺)와 왜가리 천여 마리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곳이다. 이른 봄에 왔다가 늦여름에 떠나는 철새로서 설객(雪客)이란 이름과 함께 길조로 여기면서 보호하는 새이다. 옛날에는 이 뒷동산자락 따라 냇물이 흘렀다고 하며 지금 동네터가 냇바닥이었다고 한다. 서남쪽으로 땅심좋고 논밭이 많은데「배불들」이란 땅이름이 있다. 이 배불들 가운데는 큰 물듬붕이 있는데「깐치새미」라는데 물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들 가운데 있던 수십 개의 웅동(덤붕 ; 웅덩이)은 말라도 이 깐치새미들은 물이 그대로였다고 한다. 홈골들, 고무정들 등 정겨운 땅이름이 있다. 이 큰 동네는 유래없는 난리를 겪었는데 1942년(일제치하 소화 17년) 음력 6월14일(양력 7월26일) 오후 2시경 윤모씨댁에서 실화로 큰화재가 일어났다. 한참 가뭄이 계속되던 때이고 집집마다 보릿대며 땔나무가 재여 있었으니 불길은 삽시간에 온동네로 번졌던 것이다. 당시 230호가 전소되고 인명피해 10명, 화상을 입은 분이 30여명, 가축피해 110여마리 등 엄청난 재난을 당했던 것이다. 가례 동천에는「퇴도이선생유허비」가 서있고 동네를 벗어난 길가에 꽃집 열호각에는「효자김주 허호(許琥)지려」와「열부진양정씨지려(허호공의 자당)」란 비석이 서 있고 그 옆에「통정대부사헌부감찰청주한공휘정교(正敎)수단비」가 있다. 또 옛날 면소 옆에 「현감이후겸수(□謙秀)구황선정비」가 있다. 백로의 군무가 장관인 동네, 유학의 태두인 이퇴계선생의 암각유필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1963년 4월 22일 개교한 의령여중, 1966년 12월30일 개교한 의령여자고등학교(설립자 윤태한씨)가 있다. 처음 밀양 박씨가 터 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23집이고 김씨가 36집, 정(丁)씨, 이씨, 최씨가 열두어집씩, 윤씨, 임씨, 서씨, 허씨가 예닐곱집씩 모두 212가구가 살고 있는 큰 동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