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류면 운계2구마을
법정리로는 운계리에 속하고 조례상 행정동리는 운계2구이며 자연마을이 입사(□士)인데 면소재지(석정)에서는 어린 십리길이다. 지금 마을 이름은「서있는 선비」라거나「벼슬아치가 나온다」는 뜻을 담는 아주 좋은 지명이랄 수 있는데 한때는 절로 들어가는 어귀라고 입사(入寺, □寺)란 지명을 쓰기도 했다고 하니 아마 정수암 들어가는 절동네라는 뜻인 듯 하다. 다른 이야기로는 지금 동네자리 조금 위쪽 정수암 바로 밑에 몇백석 하는 부자가 살았다고 하는데, 골밖에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를 겪고 난 흉년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골안으로 들어와서 부자집 일을 거들거나 절깐 일을 돌보면서 입살이를 하였다는 것인데 그래서 「입살이골」이「입사골」로 변음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고 또한 어떤 집 머슴이 머리 깍고 동자승이 되는 일도 있었다니 입사(入寺)란 말이 어울린다. 동네를 지나서 험한 너덜밭이 있고 앞산이 매봉산 뒷산이 진골산인데 갑을골로 넘어가는 험한 산고개가「버재」고 평촌을 통하는 것이 「도틀바구재」그리고 벽언이골로 통하는 재가「베아골재」다. 지금은 여남집이 살고 있는데 평산 신(申)씨가 8집, 경주 김(金)씨, 광산 김(金)씨, 각각 한집씩이며 토종벌이 잘되는 곳이다.
궁류면 소재지 못미쳐서 왼쪽으로 10리 가까운 긴 산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어촌(漁村)마을이 있다. 갯가 어부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뜻하는 지명이라서 우선 이상한 느낌이 든다. 옛 문헌에는 합천군 궁소면 지역이었고 1913년(대정2년)에 의령 땅으로 편입되었다. 원래는 어등화촌(於等火村 : 읽을때는「어등불말」이다)으로 신라형 지명으로서 음차(音借)지명이 아니고 훈차(訓借) 지명에 해당된다. 특히 신라 경덕왕16년(757)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하는 한편 한자화 했으며 3∼4음절 지명도 2음절화 시켰던 것이다. 이때쯤 어등불말(어등불촌)의 가운데 두글자를 빼고 어촌(於村)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일제강점기에 앞 글자를 어부 어(漁)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된다. 웃땀(2구), 아래땀(1구)과 저 안골 입사마을이 협동이다. 마을뒤엔「살메기골」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보통 「살먹골」로 부른다.「대정들」은 불매간이 있었던 곳이라서 들이름이 됐고 「주개등」은 밥주걱 모양의 산이며, 「비신댕이」는 비가 서 있던 터를 말한다. 그리고「솔등이」란 산모퉁이에 옛날 광산 김씨가 여러 집 살았는데 「살목재」길을 내고난 뒤부터 집안에 액운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살목」을「싸리맥이」로 발음하고 있는데 앞서 말한 「살막」의 경음화 현상임이 확실하다. 마을 앞 「새정자」또는「사정지껄」이란 곳은 큰 정자나무 네 그루가 있어서 넷정자나무란 말이 줄여져서 사정지껄이 된 것이며 지금은 한 나무가 죽고 세그루만 살아 있다. 동구밖에 월계처사 의성김공유적비가 서 있는데 옛날 학덕 갖춘 선비로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던 김창만공의 유적비가 서 있고 동네 안에 몽천재(夢泉齋)가 있는데 고령 박씨 재실이다. 몽천재 마당에는 운강공 박봉호(朴鳳鎬)공과 계은공 박재곤(朴在坤)공 두분의 묘표가 모셔져 있다. 광복 후에도 1백호를 헤아리던 대동이었으나 20여년전부터 이리저리 빠져 나가면서 지금은 60여 가호만 살고 있다. 박씨가 15집, 김·신씨가 각 13집씩, 이씨 8집, 강·표씨가 댓집씩 그리고 최·안·오씨도 한두집씩 살고 있다.